서태지는 어울리기 시작했고, 꼰대들은 거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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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대중을 향한 손짓과 어울림은 그가 할 수 있는 노력의 전부일 정도로 적극적이고 유쾌하다. 그가 앨범으로 보여준 유쾌함에 더불어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확실히 예전 서태지와는 다른 보폭을 보이고 있다.

쑥스러움이 유달리 많은 성격이어서 평소 많은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소집단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었던 그가, 이제 제법 많은 사람과 교류를 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예능 <해피투게더>를 시작으로 그는 9집 컴백 콘서트 무대를 마쳤고, 이어 기자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열린 마음을 확실히 보였다. 또 같은 날 출연한 JTBC <뉴스룸>에서는 생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앵커 손석희와 화기애애한 인터뷰를 진행해 좀 더 친근한 서태지를 보였다.

근래 모습을 보자면 확실히 서태지는 달라졌다. 아니 사실 달라지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좀 더 활동하는 것일 뿐 그는 달라진 게 아니다. 스스로 ‘신비주의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할 정도이니, 신비주의를 의도치 않았다는 것을 알게 했고, 그 장면은 그를 향한 오해가 얼마나 많은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실 그 말은 진실일 것이다. 창작을 향한 시간이 필요했던 그에게 쫓기는 스케줄은 많은 스트레스가 됐고, 어쩔 수 없이 공백기를 가져야만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방송사와 싸우더라도 공백을 갖는 것. 그래서 그는 매번 싸우더라도 공백기를 가졌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를 못 보니 자연스레 신비주의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고 그것은 공식이 되어 신비주의가 되어 버렸다.

의도치 않았지만, 해석은 모두의 자유라고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는 신비주의가 됐다. 그는 성격상 애써 부정하기보다는 관망하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내며 세상으로 나왔다.

그가 언론을 대하는 모습과 자신에게 몰린 관심에 대한 의문을 푸는 과정은 무척이나 단순한 모습이다. 모든 걸 인정하고 순응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 그가 바뀐 것이라고는 단순히 좀 더 활동적이 된 것 이외에는 없는 것이 특징일 정도로 그 자신은 변한 게 크게 없어 보인다.

어떤 질문에도 담담히 그는 수긍하고 부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상대를 먼저 배려했고, 악플에 대해서는 ‘내가 떡밥을 많이 던지지 않았느냐’라며 돌려 인정하는 멘트는,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게 했다.

서태지의 9집 ‘Quiet Night’는 5년에 걸쳐 만들어진 곡이라고 <뉴스룸>을 통해서 밝혔다. 손석희는 그 시간 동안 만든 것인가? 를 질문했고, 서태지는 여러 조건이 있었지만, 그 기간 만들어진 곡이 쌓여 지금의 9집이 되었다며 신비주의이기보다는 그저 오랜 시간 생활 속에서 곡이 나왔음을 밝혔다. 바로 이처럼 그의 9집은 그의 생활 일부를 옮겨 놓은 것이었기에 신비주의와는 무관한 앨범이다.



9집 이전 앨범이 혁명적인 음악이었다면, 이번 9집은 극히 한국인이 겪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노래로 그의 시도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죽은 언론의 사회이자 감시 사회인 한국. 폭력과 불통, 독재, 공포정치로 더럽혀진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국민은 피를 흘리고 수장되어 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1970~80년대 소격동을 뒤덮은 공포. 그런 사회에 살아갔던 서태지가 2014년 들고 나온 사회비판적 ‘소격동’은 과거를 그대로 베껴 놓은 듯 닮아 공포스럽다.

비록 그는 이 노래가 과거 아름답던 어린 시절의 소격동. 한옥마을의 추억과 그곳이 사라져 가는 상실감을 표현했다고 했지만, 그에 더불어 80년대 서슬 퍼런 시대를 설명하지 않고는 소격동을 표현할 수 없어 메시지를 넣었다는 말은 그 의미가 꼭 아름답지만 않은 기억이 있었음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했다.

이런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음악인이 과연 현 대한민국에 몇이나 남아 있을까! 그는 정치 사회적 비판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은 귀를 닫고, 입을 막고 있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행복할 수 없는 기억을 동시에 품고 살아가는 불행한 국민들의 아픔을 그는 노래에 담아냈다.

서태지가 손석희를 만난 것은 그래서 더욱 큰 의미이기도 하다. 서태지는 무비판적인 국민과 음악인, 연예스타를 대신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자 노래에 담아냈고, 그 아픔을 같이하고자 대중의 앞에 섰다. 손석희는 죽은 언론의 사회에서 유일한 언론 기능을 하는 JTBC의 대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만났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반가운 일이다.



그의 노래 ‘크리스말로윈’에서 등장하는 산타는 ‘나쁜 권력자’이며 ‘교활한 권력자’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했다. 아이들이 슬프면 울어야 되는데 우는 것을 어떤 권력이나 공포로 제압하는 그런 권력자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권력자는 이 시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하다. 당연히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는데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는 세상이 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서태지는 음악인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을 자신의 곡에 녹여내 보여줬다. 그러나 일부 꼰대 성향을 가진 부끄러운 집단은 그의 컴백에 수없이 많은 똥물을 뒤집어씌웠다. 그럼에도 그는 웃으며 비판은 해달라고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신비주의를 벗어 던지면서 다가왔으나, 꼰대들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그를 폄하하기 바쁘다.

뮤지션은 음악성이 있어야 하고, 음악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건 절대기준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하나 더 붙이는 평가기준이야 나름 있겠지만, 꼰대 성향의 언론인들이 폄하하는 기준인 순위차트에서 밀리니 대중성이 떨어지고, 그래서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논리는 똥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9집에서의 서태지는 혁명가이기보다는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을 나누는 이웃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의 곡은 한결같이 슬픔과 기쁨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그를 폄하할 수 있는 자라면, 그건 극히 이기적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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