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팍, 김중만의 세계를 대중에게 알리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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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팍에 사진 작가 김중만이 출연을 했다. 생각지 않은 김중만의 출연에 필자는 반가운 당황감을 가지고 방송을 봤다. 사진 작가 최고의 반열에 오른 마에스트로 김중만이 무릎팍에 나올 거란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카메라를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진 세계에 롤 모델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김중만 작품과, 조선희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 작품에 배어나는 그 감성이 좋다.

김중만 작가의 세계는 정신적인 감흥을 항상 준다. 천 개의 작품을 봐서 맘에 안 드는 작품이나 감흥을 주지 않는 작품도 분명히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무엇을 의도 한지를 모르거나 내 자신의 감성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작품에 힘과 감성을 자극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조선희 작품도 그렇다.

탑 클래스에 조세현 작가도 있지만 필자의 감성에는 약간 안 맞는 듯 한 부분도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작가가 가진 감성에 동조하고 그 감성을 같이 이해하고 반응하는 것 일 것이다. 물론 조세현의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나의 취향에서 안 맞는 작품이 조금은 있다는 표현이다.

그렇게 선망하던 스타인 김중만이 무릎팍의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이쿠~~ 이런 행운이 하며 말이다. 김중만에게 욕심이란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 욕심이란 것을 봤을 때 사람들이 안 좋게 보는 것은 상업적인 면을 추구한다는 말이 조금은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 사람이 그 순간 추구하는 작품들의 시기가 그러할 뿐이지 그는 절대로 상업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허위적인 모습이 아닌 진정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려는데 노력을 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눈에 보이는 것이다.

김중만이 이번에 들고 나온 주제는 "카메라만 들면 정신 줄을 놓습니다"였다. 이 고민은 솔직히 너무도 행복한 고민이다. 작가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말 그대로 혼을 못 넣은 쓰레기 작품 밖에 못 만들어 낸다. 하지만 김중만의 사진 세계에는 그가 추구하는 감성이 듬뿍 묻어난다. 단지 스타들의 외양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에 비난하기 보다는 그를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기술과 감성을 묻혀주는 것에 뛰어나다고 칭찬을 해야 할 것이다.


김중만은 자신이 겪어 온 사진의 길을 보여줬다. 그가 추구하는 사진의 세계를 곡해 없이 알릴 수 있는 기회로 무릎팍을 선택한 듯하다. 사진이라는 예술, 카메라로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을 하다보면 그 예술에 동질감을 못 느끼는 사람과 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사람에겐 많은 몰매를 맞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언더그라운드 적인 요소에서 오버그라운드로 갔다는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에겐 당연히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중만이 이번에 무릎팍에서 보여주고 들려준 작품 세계와 자신의 꿈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바란다.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은 끝없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남기고 싶은 하나의 세계와 자신이 거기서 할 수 있는 역할론 자로서 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 중 현재까지 촬영한 데이타 49만장과 앞으로 촬영 할 작품 포함해서 100만장을 꿈꾸지만 가족에겐 1,000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한국을 위해서 내 놓겠다고 선언한 것은 정말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그의 작품은 " 한국 사진작가 최초로 세계적 경매회사 소더비에 등재 되었고.. 그의 작품은 한 작품당 최소 2만 달러 이상으로 공식 거래 등록"이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한 시대를 기록한 작가가 되고 싶은 꿈 때문이다. 이런 결정을 가족에겐 알리지 않고 공표 한 것은 가족에게 사실 미안한 얘기지만 그 만이 할 수 있는 결정이었으리라 본다.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란 것은 그가 자유로운 영혼가 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영혼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으리라 본다. 그렇기에 김중만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큰 우상으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정부가 파견한 의사로서 아프리카 의료 봉사를 돌아가실 때 까지 하신 분이다. 그런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고 진정 행복하게 하시고 돌아가셨기에 자신도 또한 그런 우상인 아버지가 해오시고 보여준 행동들을 닮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온 재능에 그 재능으로 얻은 대부분을 환원해 주는 것은 정말 본받을 만한 것이다.


1954년 10월 13일 생으로서 2009년 현재 56세인 김중만의 모습은.. 자신의 열정을 보여주는 레게 머리의 모습이다. 김중만은 사진 찍을 때 정신 줄을 놓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 만큼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야생 동물을 찍으면서 최대한 다가가서 최고의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 시도하는 그런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누구도 못 보여줄 자신이 생각하는 감성을 살린 작품을 하나하나 만들어 낼 때 느끼는 감정은 그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이해 못 할 것이다.

중 3때 아버지를 따라서 무작정 아프리카로 떠나서 아주 기쁜 마음에 함께 했지만 자신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서 아프리카를 떠나 프랑스로 유학을 홀로 했다고 한다. 니스 국립 응용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사진작가로 인생을 급 수정을 하고.. 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고, 만 23세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이 되었다. 그러던 중 79년 돌연 한국으로 귀국해서 전시회도 열고, 85~86년 두 차례 국외로 추방을 당하기도 한다.

추방을 당한 이유는 그 당시 사회상으로 남은 암울한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극히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도 폐쇄적인 상황에서 당시 사회로서는 표현법에서 충격적인 문화를 보이는 김중만은 곱게 비추어 지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래서 두 번의 추방을 당해야만 했다. 추방을 당하면서 일본으로 가서 많은 충격과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작품 세계가 바뀌기도 했다. 전에는 밝은 면을 많이 찍던 자신이 충격으로 패닉 상태에서 온 정신적인 감정에 어두운 것이나 외로운 것을 표현해 낼 줄 아는 계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사진을 시작하게 되며.. 자신의 친구 법대생을 따라서 잠깐 도와주며 한 없이 빠지게 된 사진 세계에서.. 처음 자신이 접한 것은 누드 사진이었다고 한다. 김중만이 사실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도 시작점 이었지만 이 계기로 더욱 유명 해졌다. 자신의 일화 중 이 부분에서 약간 밝히기는 께름칙했겠지만 잘 말 해 준 것 같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모두 누드 사진을 담으면서 노하우는 최대한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자연스레 보여준 것에 있었다. 처음엔 오해 받기 쉽상이지만 자신의 작품을 바로 찍어서 결과물을 보여줌으로서 신뢰를 쌓고 입소문으로 인해 자연스레 모두 응해준 것이다.

자신이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문화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감성에서와 환경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본다. 이방인이라서 홀대를 받기 보다는 동양인으로서의 신비감이 자신을 더욱 더 빨리 그 문화의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행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훌륭하게 그 문화에 맞춰서 생활함으로서 누구보다도 빨리 성공했으리라 생각된다. 주변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 감성을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기 보다는 주변이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신비감을 가지고 누구도 잘 대해주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운으로서도 잘 풀리는 사람은 뭐를 해도 잘 풀린다고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하려고 한다. 그에 비해 운이 없을 땐 사회적인 현상으로 인해 고국에서도 탄압을 받고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중만은 이런 현실에서도 원망 보다는 희망을 가슴에 가진 듯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원망하고 떠나건만 김중만은 철저히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내 잘못 이오~를 생활화 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더욱 알아주고 함께 하려고 하는 것 일 것이다.


그의 열정은 그 결과를 낳게 만들 요소를 충분히 갖추었다. 그는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시작하면서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서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 열정에 있었던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도 이 정도로 열심히 해서 얻지 못하는 상황은 없다. 그것을 보여주듯 김중만은 카메라를 들고 밥을 먹고, 순간순간의 모든 기억을 사진으로 데이타화 하고, 사진 촬영을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 신이 나는 순간으로 여기며 즐기는 것이다. 

김중만은 국내 최초로 아프리카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했고, 국내 초특급 스타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그려냈다. 그러던 중 2006년에는 돌연 상업적인 활동을 중단 선언을 했다. 사진으로는 돈을 안 벌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는 이런 상업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생긴 새로운 타입의 수입원이 생겼다고 한다. 바로 한국 관광 공사에서 전화가 와서 시작한 대한민국 엽서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들을 하면서 한국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기쁨을 갖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문화재청에서도 일이 들어오고.. 어느 정도 생계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남 몰래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희망의 축구 골대를 만드는 열의도 보여주고 있다.

상업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도 2000년도가 넘어서 잠깐 했었던 것이었다. 그 이유도 순전히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4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 한 채 없는 미안함에 가족을 위해 결심하며 명함도 만들고 스튜디오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며 이름도 유명해지면서 너무 바빴고 그 당시 바쁜 정도는 카페 20개 테이블에서 모두 자신의 스케쥴을 차례대로 기다리면서 순서대로 찍어 본 적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열정이 묻힌 땅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그의 청소년기 추억을 만들어 준 프랑스를 여전히 흠모하며, 조국인 한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가진 김중만의 꿈은 카메라로 남길 수 있는 사진 작품 100만장을 위한 꿈이다. 백만돌이 이시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남기고 싶은 작은 소원이 분명 이루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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