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우리도 잘 모르는 역사의 아픔
- [여행] 국내여행
- 2011. 7. 1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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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문화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옛 것을 모르고 새 것 만을 알려고 하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으리라.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고, 우리의 역사의 우수함을 알려하지 않으며, 남의 역사를 칭찬한다는 것은 이 나라 사람의 기본 소임을 잊은 행동일 것이다.
간단하게 우리는 지금까지도 '창덕궁'이라는 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심지어 지금을 살아가는 일부 사람들은 '창덕궁'이라고 하면 작은 곳이라고도 생각한다. 예전에도 잠시 TV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우리의 궁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은 변함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창덕궁' 이곳은 엄연히 '궁'이라고 하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덕궁'은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그러한 이유에는 날조된 역사 속의 아픔이 배어 있어서일 것이다. 이 작은 프로그램에서도 비추어 졌듯, 그 당시 <무한도전> 멤버들이 택시를 타고 '창덕궁'을 찾아야 하는 미션에서 택시기사에게 '창덕궁을 가자'라는 말에 못 알아들어서 결국 멤버들은 서울시에 대해서 지식을 주는 전화로 문의를 하는 고생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것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저씨(택시) 창덕궁으로 가요'
"네? 창덕궁이요?"..........(음).......... "저 죄송한데 창덕궁이 어디에 있는 거예요"
참 땀나는 말이었다. 그래도 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았기에 '아 네 예전 비원이라고 불렸던 곳 입니다'.. 지금은 제대로 불리어야 할 '창덕궁' 말 입니다.
다시 한 번 '비원'이 아니고 '창덕궁'이라고 택시 기사에게 이야기를 해 겨우 인식을 시켰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이 택시 기사가 창덕궁이 비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수고스럽지만 이야기를 건넨다.
비단 이 문제는 택시 기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서울과 지방에 사는 이들에게 이곳은 곧 잘 '창덕궁' 보다는 비원이라고 불린다. 난 왜 이 글을 쓰는가? 그것은 단 한 명이라도 수치스러운 '비원'이라는 말을 안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그렇다면 왜? '비원'이라는 말을 써서 창덕궁을 찾으면 안 될까?
그 이유는 일제 치하의 민족혼 말살 정책에 이유가 있다. 1904년 지어진 창덕궁 후원의 관리사무소 '비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창덕궁'이라는 말을 못 쓰게 하기 위해서 관리사무소의 이름인 '비원'을 전면에 달며 사람들의 인식이 이곳이 비원이라고 느끼게 했다. 그와 함께 '창경궁'은 궁의 이름이 아닌 동물원 이름인 '창경원'으로 만들었던 것이 일제의 만행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야 '창경궁'이 '창경원'이 아니라는 것을 대부분 안다고 하지만, 어른 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창경궁'은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계속해서 가고 있는데, 우리의 민족의식은 아직도 일제의 치욕적인 문화 말살 정책으로 바뀌어 변할 기세가 없다는 것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 된 것이다.
강점기를 지난지도 수십 년이 지나도 역사의식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이 역사의식에서 많이 뒤쳐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창덕궁'을 비원으로 아는 한심한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아는 이가 있는 것이 그래서 답답함이다.
마침 그런 답답함이 있던 나의 발걸음 앞에는 국가브랜드위원회 이배용 위원장이 일일 자처해서 나선 문화해설로 인해서 더더욱 그런 답답함의 갈증을 풀어주는 계기를 제공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이배용 위원장의 말로 전해들은 이런 치욕의 역사 속에서의 날조된 역사의 아픔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아픈 경험을 주게 된다. 나라를 빼앗기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은 심히 공감이 되는 말이 됐다.
"우리가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문화도 못 지키게 된다"
이 말은 바로 이배용 위원장의 말 속에 나온 말이다. 그만큼 울분의 역사를 철저히 기억해서 다시는 반복이 되지 말자는 생각에서도 적극 공감할 수밖에 없었고, 아픔으로 다가온 말이기도 하다.
또한 좋은 기회로 인해서 따라다니며 주어들은 말 속에는 중요한 말이 있었다.
'법고창신의 정신'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며, 옛 것에 토대를 두어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매우 중요한 것은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옛 것을 다 버리고, 모르면서 오늘을 시작한다는 말은 큰 모순이라는 가르침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역사의 중요성과 우리가 모르며 사용했던 '비원'이라는 말과 '창경원'은 다시 써서는 안 될 말이라는 것을 정리하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본다.
마침 찾은 아침 일찍이도 외국인 여성들이 돈화문 앞을 찾은 모습이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5년에 완공이 되었다. 시작은 1404년 태종 4년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을 짓기 시작한 것이며, 이듬해 완공하여 '창덕궁'이라고 명명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도 했지만, 1607년 선조 때 그 복구가 시작되어 광해군 2년인 1610년 중건이 끝나갔다. 대부분 불타 복구가 어느 정도 된 것이 1647년 인조 때 완료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중요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세계의 자랑거리로서 '창덕궁'은 그렇게 핍박을 받고서도 살아있는 문화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세계적인 궁 문화가 남아있다는 것은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함이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금천교는 중앙 통로가 '임금'이 지나는 길로 '어도'였으며, 좌측 길은 문관이.. 우측 길은 무관이 지나는 길로 전해진다. 진선문에는 신문고가 배치되기도 했다.
600년을 한 곳에서 끊임없이 악귀의 침입을 지키는 거북이의 모습이다. 창덕궁은 환란을 겪으면서 불에 타고, 복원이 되었지만, 이 거북이는 한 곳에서 계속 자리해 변함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거북이였다.
그와 반대쪽인 금천교 하단에는 '해태'가 남쪽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궁에 들어서기 전 개천이 있는 이유는 '마음을 정화하고 들어서라는 심고한 뜻'이 있어서라고 한다. 공정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는 뜻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해태'라는 상징적인 동물의 의미를 찾자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동물'로서 관리들의 마음을 심사하는 의미에서 새겨 넣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인정문' 쪽으로 향하는 이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본다.
인정문을 들어서니 눈앞에 '인정전'이 한 눈에 펼쳐진다.
'인정전'은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이곳은 1985년 국보 제225호로 지정이 되었고,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진 국보다. 인정전은 겹처마이며 각 마루에는 양성하여 취두, 용두, 잡상을 올려놓았다. 건물 상단 모서리 부분 뾰족하게 양쪽에 일곱 개씩 튀어나온 잡상 모양은 '손오공 행렬'이라고 전해진다.
손오공은 서유기에서 환란을 꾀로 돌파하고 극복하여 이 부분을 이겨내라는 뜻에서 새겨 넣었다고 한다.
팔작지붕의 인정전 앞에는 '드므'도 볼 수 있었다. '드므'는 방화수를 담는 용기다.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뜻에서 상징적으로 새겨 넣은 것이다. 화재예방을 위한 지혜였다.
보물 제814호인 '선정전'이다. 청기와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진 곳.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이다. 세종이 8년에서 근 10년간을 이곳에서 정치를 했다고 한다. 선정전은 정치를 잘 베풀면서 하라는 메시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궁에서 유일하게 복도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치를 꼭 어디 한 곳을 정해놓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각 궁을 옮겨가면서 정치를 했고, 어디든 움직이면서 정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화기 때 변형된 건물로서 임금의 침전과 연결이 된 곳이다. 자동차가 닿을 곳이었기에 로비 형태로 변형된 것을 볼 수 있다.
보물 제816호 '대조전'이다. 역시 팔작지붕 형태다.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 되는 자리를 차지했다.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다고 한다.
대조전을 돌아 들어가니 왕비의 후원이 눈에 펼쳐진다. 왕비의 정원 후원 공간이다.
이곳에는 왕비의 이동식 화장실이 있다고도 했다.
후원으로 가는 길.
육각정 상단에는 꽃봉오리가 눈에 보인다. 피지 않은 연꽃 꽃봉오리가 인상적이다.
보름달 같은 마음의 문이 바로 옆에 자리해 있다.
육각정에서 보름달 모양의 문을 건너와 보니 담벼락에 새겨진 모양들이 눈에 띈다. 양쪽 위에 새겨진 포도송이의 모습과 그 밑에는 포도를 주워 먹는 다람쥐가 보인다. 담에는 꽃의 모양과 글자들이 가득하다.
부용지에 도착하여 연꽃을 바라본다. 여기서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고 한다. 즉 연꽃연못의 뜻이 '부용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과 수련을 판별하는 기준은.. 연은 잎파리에 꽃이 피고, 수련은 줄기가 올라와 그 위에 피는 것을 보고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규장각'과 '어수문'이 보인다. 부용지와 영화당이 있는 곳 '춘당지'에서 춘당배 시험이라는 과거시험을 보고 합격한 이들이 규장각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규장각'은 도서관이며 서고다.
'부용지'에는 물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뜻이 있어서 박혀있는 것이다.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연결된 뜻이며, 물고기가 급류를 헤치고 뚫고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즉 과거시험을 통해서 선발된 인물이 나라의 인재가 되어 용의 형세를 지닌 인물이 되라는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당'의 모습. 과거합격자를 가리는 시험장소였으며, 나중에 임금이 합격자를 가리어 칭찬하고 격려하는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가면 늙지 않는다고 하는 문이다. '불노문' 딱 들어도 이해가 갈 단어다. 예전에는 문도 달았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선형 기와지붕을 굴도리집. 원주 기둥을 세워 물 위에 걸쳐놓는 특이한 방식으로 만들었다.
부챗살 모양의 정자로 홑처마에 추녀마루 6개가 각각 3개씩 모여, 그 사이에 용마루를 설치한 형식의 양식으로 특유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부챗살 모양의 정자라는 것이 참 매력적인 정자였다.
이곳에는 왕자들이 팔자걸음을 익힐 수 있는 연습장이 있다. 촐싹대면서 걷지 말고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보폭을 넓혀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정치하라는 뜻으로 놓였다고 한다. 포용과 배려로 정치를 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창덕궁 후원 북쪽 깊은 곳 골짜기에 다다르면 인조 14년에 조성된 '옥류천'을 볼 수 있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으로 부터 계류가 흐르는 곳이다.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 샘물을 끌어 올려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청의정'과 '태극정'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청의정'은 옥류천 주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정자다. 궁궐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하고 있다. 사모지붕을 얹고 난간을 두른 단청 장식의 정자다. 정자 앞쪽에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 볏짚으로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이 농사의 중요함을 알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태극정'은 인조 1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운영정이라고 불리다가 태극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겹처마 사각정자이다. 태극정에는 우주 생성의 원리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오행과 오성이 어떻게 합치되는지 볼 수 있다고도 했다.
단지 '궁'이라는 아득한 단어만으로 구경을 하는 일은 이제 조금은 벗어날 때가 아닐까 하는 발걸음이었다. 또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접근을 하며 보면 모르던 재미를 더 느낄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문화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이를 구경하는 외국인들에게 좀 더 우수한 가치의 우리 문화를 알리는데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바람은 이런 글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올바른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굳이 사진만이 아닌 글을 길게 쓰는 이유는 하나다.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지식을 알렸으면 하는 바람. 그것 때문에 난 지금도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 불편한 장문의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간단하게 우리는 지금까지도 '창덕궁'이라는 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심지어 지금을 살아가는 일부 사람들은 '창덕궁'이라고 하면 작은 곳이라고도 생각한다. 예전에도 잠시 TV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우리의 궁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은 변함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창덕궁' 이곳은 엄연히 '궁'이라고 하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덕궁'은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그러한 이유에는 날조된 역사 속의 아픔이 배어 있어서일 것이다. 이 작은 프로그램에서도 비추어 졌듯, 그 당시 <무한도전> 멤버들이 택시를 타고 '창덕궁'을 찾아야 하는 미션에서 택시기사에게 '창덕궁을 가자'라는 말에 못 알아들어서 결국 멤버들은 서울시에 대해서 지식을 주는 전화로 문의를 하는 고생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것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저씨(택시) 창덕궁으로 가요'
"네? 창덕궁이요?"..........(음).......... "저 죄송한데 창덕궁이 어디에 있는 거예요"
참 땀나는 말이었다. 그래도 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았기에 '아 네 예전 비원이라고 불렸던 곳 입니다'.. 지금은 제대로 불리어야 할 '창덕궁' 말 입니다.
다시 한 번 '비원'이 아니고 '창덕궁'이라고 택시 기사에게 이야기를 해 겨우 인식을 시켰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이 택시 기사가 창덕궁이 비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수고스럽지만 이야기를 건넨다.
비단 이 문제는 택시 기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서울과 지방에 사는 이들에게 이곳은 곧 잘 '창덕궁' 보다는 비원이라고 불린다. 난 왜 이 글을 쓰는가? 그것은 단 한 명이라도 수치스러운 '비원'이라는 말을 안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그렇다면 왜? '비원'이라는 말을 써서 창덕궁을 찾으면 안 될까?
그 이유는 일제 치하의 민족혼 말살 정책에 이유가 있다. 1904년 지어진 창덕궁 후원의 관리사무소 '비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창덕궁'이라는 말을 못 쓰게 하기 위해서 관리사무소의 이름인 '비원'을 전면에 달며 사람들의 인식이 이곳이 비원이라고 느끼게 했다. 그와 함께 '창경궁'은 궁의 이름이 아닌 동물원 이름인 '창경원'으로 만들었던 것이 일제의 만행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야 '창경궁'이 '창경원'이 아니라는 것을 대부분 안다고 하지만, 어른 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창경궁'은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계속해서 가고 있는데, 우리의 민족의식은 아직도 일제의 치욕적인 문화 말살 정책으로 바뀌어 변할 기세가 없다는 것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 된 것이다.
강점기를 지난지도 수십 년이 지나도 역사의식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이 역사의식에서 많이 뒤쳐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창덕궁'을 비원으로 아는 한심한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아는 이가 있는 것이 그래서 답답함이다.
마침 그런 답답함이 있던 나의 발걸음 앞에는 국가브랜드위원회 이배용 위원장이 일일 자처해서 나선 문화해설로 인해서 더더욱 그런 답답함의 갈증을 풀어주는 계기를 제공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이배용 위원장의 말로 전해들은 이런 치욕의 역사 속에서의 날조된 역사의 아픔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아픈 경험을 주게 된다. 나라를 빼앗기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은 심히 공감이 되는 말이 됐다.
"우리가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문화도 못 지키게 된다"
이 말은 바로 이배용 위원장의 말 속에 나온 말이다. 그만큼 울분의 역사를 철저히 기억해서 다시는 반복이 되지 말자는 생각에서도 적극 공감할 수밖에 없었고, 아픔으로 다가온 말이기도 하다.
또한 좋은 기회로 인해서 따라다니며 주어들은 말 속에는 중요한 말이 있었다.
'법고창신의 정신'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며, 옛 것에 토대를 두어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매우 중요한 것은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옛 것을 다 버리고, 모르면서 오늘을 시작한다는 말은 큰 모순이라는 가르침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역사의 중요성과 우리가 모르며 사용했던 '비원'이라는 말과 '창경원'은 다시 써서는 안 될 말이라는 것을 정리하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본다.
마침 찾은 아침 일찍이도 외국인 여성들이 돈화문 앞을 찾은 모습이었다.
<창덕궁 내 진선문으로 향하는 금천교>
창덕궁은 1405년 태종 5년에 완공이 되었다. 시작은 1404년 태종 4년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을 짓기 시작한 것이며, 이듬해 완공하여 '창덕궁'이라고 명명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도 했지만, 1607년 선조 때 그 복구가 시작되어 광해군 2년인 1610년 중건이 끝나갔다. 대부분 불타 복구가 어느 정도 된 것이 1647년 인조 때 완료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중요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세계의 자랑거리로서 '창덕궁'은 그렇게 핍박을 받고서도 살아있는 문화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세계적인 궁 문화가 남아있다는 것은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함이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금천교는 중앙 통로가 '임금'이 지나는 길로 '어도'였으며, 좌측 길은 문관이.. 우측 길은 무관이 지나는 길로 전해진다. 진선문에는 신문고가 배치되기도 했다.
600년을 한 곳에서 끊임없이 악귀의 침입을 지키는 거북이의 모습이다. 창덕궁은 환란을 겪으면서 불에 타고, 복원이 되었지만, 이 거북이는 한 곳에서 계속 자리해 변함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거북이였다.
그와 반대쪽인 금천교 하단에는 '해태'가 남쪽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궁에 들어서기 전 개천이 있는 이유는 '마음을 정화하고 들어서라는 심고한 뜻'이 있어서라고 한다. 공정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는 뜻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해태'라는 상징적인 동물의 의미를 찾자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동물'로서 관리들의 마음을 심사하는 의미에서 새겨 넣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인정문' 쪽으로 향하는 이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본다.
인정문을 들어서니 눈앞에 '인정전'이 한 눈에 펼쳐진다.
'인정전'은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이곳은 1985년 국보 제225호로 지정이 되었고,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진 국보다. 인정전은 겹처마이며 각 마루에는 양성하여 취두, 용두, 잡상을 올려놓았다. 건물 상단 모서리 부분 뾰족하게 양쪽에 일곱 개씩 튀어나온 잡상 모양은 '손오공 행렬'이라고 전해진다.
손오공은 서유기에서 환란을 꾀로 돌파하고 극복하여 이 부분을 이겨내라는 뜻에서 새겨 넣었다고 한다.
팔작지붕의 인정전 앞에는 '드므'도 볼 수 있었다. '드므'는 방화수를 담는 용기다.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뜻에서 상징적으로 새겨 넣은 것이다. 화재예방을 위한 지혜였다.
보물 제814호인 '선정전'이다. 청기와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진 곳.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이다. 세종이 8년에서 근 10년간을 이곳에서 정치를 했다고 한다. 선정전은 정치를 잘 베풀면서 하라는 메시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궁에서 유일하게 복도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치를 꼭 어디 한 곳을 정해놓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각 궁을 옮겨가면서 정치를 했고, 어디든 움직이면서 정치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화기 때 변형된 건물로서 임금의 침전과 연결이 된 곳이다. 자동차가 닿을 곳이었기에 로비 형태로 변형된 것을 볼 수 있다.
보물 제816호 '대조전'이다. 역시 팔작지붕 형태다.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 되는 자리를 차지했다.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다고 한다.
대조전을 돌아 들어가니 왕비의 후원이 눈에 펼쳐진다. 왕비의 정원 후원 공간이다.
이곳에는 왕비의 이동식 화장실이 있다고도 했다.
후원으로 가는 길.
육각정 상단에는 꽃봉오리가 눈에 보인다. 피지 않은 연꽃 꽃봉오리가 인상적이다.
보름달 같은 마음의 문이 바로 옆에 자리해 있다.
육각정에서 보름달 모양의 문을 건너와 보니 담벼락에 새겨진 모양들이 눈에 띈다. 양쪽 위에 새겨진 포도송이의 모습과 그 밑에는 포도를 주워 먹는 다람쥐가 보인다. 담에는 꽃의 모양과 글자들이 가득하다.
부용지에 도착하여 연꽃을 바라본다. 여기서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고 한다. 즉 연꽃연못의 뜻이 '부용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과 수련을 판별하는 기준은.. 연은 잎파리에 꽃이 피고, 수련은 줄기가 올라와 그 위에 피는 것을 보고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규장각'과 '어수문'이 보인다. 부용지와 영화당이 있는 곳 '춘당지'에서 춘당배 시험이라는 과거시험을 보고 합격한 이들이 규장각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규장각'은 도서관이며 서고다.
'부용지'에는 물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뜻이 있어서 박혀있는 것이다.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연결된 뜻이며, 물고기가 급류를 헤치고 뚫고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즉 과거시험을 통해서 선발된 인물이 나라의 인재가 되어 용의 형세를 지닌 인물이 되라는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당'의 모습. 과거합격자를 가리는 시험장소였으며, 나중에 임금이 합격자를 가리어 칭찬하고 격려하는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창덕궁 내 불노문>
이곳을 지나가면 늙지 않는다고 하는 문이다. '불노문' 딱 들어도 이해가 갈 단어다. 예전에는 문도 달았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창덕궁, 관람정>
선형 기와지붕을 굴도리집. 원주 기둥을 세워 물 위에 걸쳐놓는 특이한 방식으로 만들었다.
부챗살 모양의 정자로 홑처마에 추녀마루 6개가 각각 3개씩 모여, 그 사이에 용마루를 설치한 형식의 양식으로 특유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부챗살 모양의 정자라는 것이 참 매력적인 정자였다.
이곳에는 왕자들이 팔자걸음을 익힐 수 있는 연습장이 있다. 촐싹대면서 걷지 말고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보폭을 넓혀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정치하라는 뜻으로 놓였다고 한다. 포용과 배려로 정치를 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창덕궁 후원 북쪽 깊은 곳 골짜기에 다다르면 인조 14년에 조성된 '옥류천'을 볼 수 있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으로 부터 계류가 흐르는 곳이다.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 샘물을 끌어 올려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청의정'과 '태극정'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청의정'은 옥류천 주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정자다. 궁궐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하고 있다. 사모지붕을 얹고 난간을 두른 단청 장식의 정자다. 정자 앞쪽에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 볏짚으로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이 농사의 중요함을 알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태극정'은 인조 1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운영정이라고 불리다가 태극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겹처마 사각정자이다. 태극정에는 우주 생성의 원리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오행과 오성이 어떻게 합치되는지 볼 수 있다고도 했다.
단지 '궁'이라는 아득한 단어만으로 구경을 하는 일은 이제 조금은 벗어날 때가 아닐까 하는 발걸음이었다. 또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접근을 하며 보면 모르던 재미를 더 느낄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문화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이를 구경하는 외국인들에게 좀 더 우수한 가치의 우리 문화를 알리는데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바람은 이런 글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올바른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굳이 사진만이 아닌 글을 길게 쓰는 이유는 하나다.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지식을 알렸으면 하는 바람. 그것 때문에 난 지금도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 불편한 장문의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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