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여행,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옛 기억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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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에 살아봐서 옛 달동네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옛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바로 옛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을 구경해보면 어렴풋한 옛 기억이 점점 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옛 시절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갈 사람 없는 현재지만.. 뭔가 옛 기억을 그리다보면 아련한 그리움이 감성을 유달리 자극하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연탄을 때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살아갔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보통일 게다. 그러나 얼추 부모님 세대라고 하는 연령대 사람에게 물어보면 쉽게 옛 시절들의 작은 편린들을 모아보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을 볼 수 있다. '엄마~ 옛날에 어떻게 살았어'라는 말은 그만큼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기본적으로 생활상이 매우 다르기에 대답을 해주며 그 간극을 느껴보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그래! 엄마는 예전에 너는 모르는 시대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살았어!' 또는 '예전에 못 살던 시절 연탄가스로 죽.을 뻔 했어'라는 등의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만큼 내가 안 당해 봐도 그 주변인들은 늘 이런 생활을 달고 살던 시절이 그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발전해 가면서 이런 모습도 차츰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남아있는 박물관이 있다면 한 번 찾아보는 재미도 누려보자.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동에는 2011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 세대 중 3,40대 이상의 옛 추억을 간직한 '달동네 박물관'이 하나 남아있다. 옛 인천 지명으로 볼 때에는 만수산이나 송림산으로 알려지기도 한 지금의 '수도국산'에 남아있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옛 추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부모님 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 시대를 살아 보았던 부모님 세대들이 아련한 향수를 그려보는 시간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1960년에서 70년대까지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며 시점을 잡아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수도국산박물관'의 특징이기도 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의 구조로 되어 있는 이곳은 2005년 10월 개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시관의 구성은 <수도국산 역사 배움터>, <수도국산 달동네 알아보기>, <달동네 삶의 편린들 모아보기>, <달동네 생활상 엿보기>, <여럿이 사용하는 공간 보기>, <달동네 상점> 등을 볼 수 있다.


원래 지명인 '송림산'은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어느새 이곳의 지명은 '수도국산'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유에는 인천의 역사와 맞물려 있는데,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몰려들어오고.. 그들이 살아가는 조계지에서 밀려난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곳으로 유입이 되어 소나무가 많은 송림산의 소나무가 베어지고 차츰 달동네로 형성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 통감부의 강압으로 인해 1906년 탁지부에 수도국을 신설.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을 잇는 수도관 공사를 시작하여 당시 일본인들에게 이 물이 제공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땅을 파도 짠 물이 나오는 곳이었기에, 서울에 있는 물을 이곳에 대어 돈을 받고 팔았다고도 한다.


당시 물탱크가 묻혀있는 수도국산 정상의 장소이다.


현재 물탱크가 묻혀 있는 그 위의 장소는 공사를 거쳐 롤러브레이드장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트랙이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현재도 물탱크는 잘 사용이 되고 있다고 한다.


'수도국산박물관'을 들어가면 수도국산 달동네를 알 수 있는 약간의 정보들이 담긴 요약 정보를 볼 수 있다. 관람할 수 있는 요금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저렴하기에 언제든지 마음놓고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곳이다. 어른 기준으로 500원의 입장요금이니 말 다한 수준 아니겠는가. 어린이는 200원, 청소년은 300원의 매우 저렴한 입장 요금이다.


달동네 생활상을 알려주는 정보도 보인다. 우리의 달동네 모듬살이라고 표현해 놓았는데. 이 '모듬살이'라는 말은 사회생활을 다듬은 순우리말이기에 애용해도 좋을 말이다.


이곳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시점 전시를 하는 곳을 알면 그 시대를 알 수 있고, 부모님 세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시점은 1971년의 달동네 모듬살이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괘종시계도 볼 수 있으며, 교복가지도 볼 수 있다. 영화 <친구>에서 볼 수 있고, 옛 영화에서 단골처럼 보이는 교복과 모자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1971년 살아가던 중학생들이 이 교복과 모자를 쓰고 다녔다.

예전 어렵게 살던 시절은 벽지가 따로 없었다. 신문지를 벽지삼아 발라 사용하던 것이 그 시절이었다. 옷걸이조차도 나무 판에 듬성듬성 박힌 못으로 해결하던 시절이었다.


지붕 아래로 벽을 꾸미는 창과 보안 창틀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절은 전쟁을 거치고, 수습을 하며 지나 군부시절로 들어섰기에 '보안'과 '반공', '방첩'이라는 단어들이 많았고, '불조심'은 집 주변과 학교 관공서 마을 곳곳 아무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단어였다.

문패 하나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 유행하는 가사조차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일 정도였다. 그래서 그 시절 유행가가 바로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이곳이 달동네란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 같은 '연탄구매권'은 이곳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추억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연탄구매권 신분증 등 당시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실제 당시 이 지역에 살던 노인 분을 표현한 것이 흰색 얼굴의 어르신 모습의 인형이다. 그리고 뒤에 회색 얼굴을 한 인형이 가상 인물로 표현해 놓은 뻥튀기 장사의 모습이다.

그 예전 시골에서도 달동네 못지않게 주기적으로 이동 뻥튀기 장사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굳이 장에 가지 않아도 마을마다 찾아다니는 뻥튀기 장사들이 이런 모습들을 자주 보여주고는 했다.


연탄집 지붕 양철 지붕도 옛 기억을 살려준다. 나무 전봇대에 양철지붕을 보기란 여간해서 이젠 보기 힘든 구경거리일 것이다. 도시화 되면서 일상의 어느 한 부분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이 이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솜틀집도 볼 수 있었다. 내가 살아가던 시골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보는 솜틀집은 그 시절 어떻게 가공이 되는지를 이렇게 알 수 있게 된다.


지게로 연탄을 차곡차곡 쌓는 연탄장사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쉽게 볼 수 있는 지명을 딴 상점도 보인다. 예전 상점들은 이런 모습들을 많이 했다. 지역적으로 앙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인천이나 내가 자란 충청도나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이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아낙의 모습도 목격할 수 있다. 돌과 흙으로 쌓은 아궁이 입구 사이로 나무를 쑤셔 넣어 한 밤 추위를 달래는 모습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달동네였기에 물을 쉽게 구할 수 없어 물을 파는 곳에서 사가려 기다리는 모습이 옛 모습을 상상케 한다. 물동이를 짊어진 사내의 모습이 그 시절을 쉽게 연상케 한다.


인천이 성냥공장으로 유명하듯, 달동네 집 좁은 방에는 성냥갑 만드는 식구들의 생활도 엿볼 수 있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 한 두 곳 남아있을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옛 골목길의 모습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싼 방 구하는 외지 학생들이 달동네를 찾아올라 봤을 것 같은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시멘트로 네모반듯하게 정돈된 부엌도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대부분의 집 부엌들이 이렇게 변해가기도 했다. 그래도 아궁이는 그대로 유지되기도 했으며, 좀 더 투자해 연탄 때는 부엌으로 변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연탄 때는 곳이 부엌으로 들어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천만한 구조였다고 생각이 든다.

꽉 막힌 부엌에 연탄아궁이라니! 제대로 방안처리를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틈새로 새어 들어온 연탄가.스에 생명도 위험한 시대를 우리 부모 세대는 지나왔다. 연탄가.스 마시면 동치미 국물이 좋다고 들이마시게 했던 시절이 그 시절이었다.


버선과 화로 1971년 달동네의 모습이리라. 부모님도 어린 시절 이 버선을 신고 살았으니 나도 이 추억의 시대를 같이 공유하며 살아왔구나 생각을 하게 된다. 재봉틀 가지고 있는 집이면 그래도 어느 정도 살아가던 집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조금이라도 큰 곳 담장이나 벽에는 여지없이 나붙던 영화포스터다. 일괄적인 사이즈였기에 영화관에서 매번 찾아와 같은 자리에 붙이고 가고는 한다.


어느 잘 살던 집 부엌을 바깥에서 본 모습이리라. 조기를 메달아 놓고 있을 정도였다면 이곳은 마을에서도 어느 정도 살던 집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역시 돌아서니 유리창으로 비치는 방 안 TV수상기가 눈에 띈다. 마을에 TV가지고 있는 집은 한 두 집이 다인데, 이 집은 그 중 꽤 사는 집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다 만 빨래가 추위에 얼어 있다. 한 쪽에는 다 탄 연탄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겨울 어둑한 일상의 모습을 대신 보여주고 있었다.


동네 만화방의 모습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옆에 당시의 상점을 볼 수 있었다. '요술공주 밍키'라니 '헉~' 소리가 났다. 어린 시절 나 또한 이 만화를 기억하고 있으니 그러면 나도 비슷한 기억을 가진 부모세대? 헉!

그래도 난 딱지보다 그 옆에 있는 조립장난감을 좋아했다. 아주 싼 것은 100원, 200원 했고, 그래도 약간 봐 줄만 한 것이 500원 아주 비싼 것은 1,000원 하던 조립장난감이었다. 그 이상도 있었지만.. 어디 감히 그런 것을 넘보리.

인천 동구 송현동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볼 것 많은 구경거리를 제공해줬다. 입장료도 저렴하고 언제든지 주변 여행을 겸해 올 수 있는 멋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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